오늘 낮에 '킹스 스피치'를 보고 왔습니다. 원래 제 영화 보는 스타일이 아침 일찍 일어나서 조조를 보고 난 뒤에 그날 일정을 시작하는 건데, 늦잠을 자는 바람에 볼까 말까 고민을 좀 했지요. 쟝르가 액션이나 SF였으면 고민 안 하고 봤겠지만, 이건 그런 거랑은 관련 없는 물건이라 고민을 했는데...
여담으로, 전 극장용 영화는 극장 화면을 볼 때와 TV화면으로 볼 때의 감상이 완전히 달라야 한다는 화면빨(=특수효과+난리법석) 지상주의자인데...
보고 난 다음의 감상은...한 마디로 말해서 "심봤다!"
요즘 화제가 되는 블록버스터들에 비하면 그야말로 초초초저예산 영화이고, 배우와 장소 섭외만 끝나면 소도구만 가지고 찍을 수 있는 그런 영화입니다.(아, 옛날 자동차들은 좀 나오는군요.) 특수효과라고는 CG로 그려넣었을 런던 상공의 방공기구 정도.(군중씬이 있는데, CG같기는 하지만 엑스트라 동원하면 CG 없이도 찍을 수 있는 수준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미있었습니다. 상을 좀 많이 탔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알고 보니 좀 많이 탄 게 아니더군요. 아카데미, 골든글로브, 토론토 국제영화제, 영국 아카데미를 합쳐서 19개의 상을 받았습니다.
문제가 있다면...그 시절의 사건들에 대해 모르면 재미가 떨어질 수 있다는 점. 보통 영화는 내용을 알고 보는 것보다 내용을 모르고 보는 게 더 재미있는데(굳이 "절름발이가 범인이다!"나 "브루스 윌리스가 유령이다!"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말이지요.), 이 영화는 반대로 1930년대에 영국 왕실에서 있었던 일을 어느 정도 알아야 재미를 느낄 수 있습니다.
어찌 보면 영화가 좀 불친절하기 때문이기도 한데...아무 사전 지식 없이 영화를 보면 중간 중간에 뜬금 없이 인물들이 튀어나오고, 뜬금 없이 사건들이 벌어지는 걸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실제 역사를 바탕으로 영화를 만들 때 생기는 문제점들 중 하나지요. 하나 하나 설명하다 보면 그야말로 날을 세야 되니, 관객이 어느 정도의 역사적 지식은 갖추고 있다는 전제 하에 영화가 만들어졌고, 그러다 보니 영화의 내용-실제 사건을 알고 있어야 영화의 흐름을 제대로 따라갈 수 있는 거지요. 대신 '극적 반전' 같은 건 영화 보러 나올 때 집에 놔두고 와야 하지만...('발키리'가 그랬지요.)
그렇게 뻔히 아는 얘기, 뻔한 결말을 가지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낸 게 이 영화의 대단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우수수 상을 받을 만한 이유가 있었던 거지요. 블록버스터도 아니고, 톱스타들이 출연하는 것도 아닌 영화가 그렇게 입소문을 탄 걸 보면 비평가나 심사위원 뿐만 아니라 관객들에게도 어필하는 데 성공했다는 뜻이겠지요.
개봉 2주차가 지났으니, 아마 이번 주중에 간판이 내려갈 것 같네요.(제가 본 곳에서도 하루 3번인가 4번 밖에 상영을 안 하더군요.) 오늘 안 봤으면 영영 놓칠 뻔 했습니다.
그리고 칸을 좀 띄우겠습니다. 영화 내용 누설이 나오니 안 보신 분들은 피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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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가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하이라이트인 연설 장면이 아니라 선왕 조지 5세의 붕어 장면이었습니다. 조지 6세가 임종하자 메리 왕비가 가장 먼저 한 행동은 남편의 죽음에 대한 애도가 아니라 장남의 손등에 키스하고 '국왕폐하 만세'를 말하는 것이었죠. 그걸 보고 '아, 저게 바로 왕실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 두번째로 인상깊었던 장면도 비슷한데...에드워드8세의 폐위 직후에 조지 6세의 두 딸-엘리자베스(여왕 폐하 만세.)와 마거렛이 조지 6세에게 인사하는 장면이었습니다. 이전에는 '아빠papa'라고 부르며 안기던 두 딸이 그때는 스커트 끝을 잡고 무릎을 숙이며 '폐하Your majesty'라고 부르지요. 역시나 왕실 퀄리티...
3. 다 보고 나서 느낀 점 중의 하나는, 역시나 심슨부인은 영국 사람들한테 미운 털이 단단히 박혔다는 거.(그래도 그 된장 아줌씨 덕분에 에드워드 8세 같은 골치덩어리를 쫓아낼 수 있었지요.)
4. 아, 인상 깊은 장면 하나 더. 비행기 모형 조립하는 조지 6세. 잘 했다고 상으로 비행기 부품 하나 붙이게 해준 로그도 로그지만, 그 말 듣고 열심히 본드칠하는 조지 6세는 또...
뭔가 인상남으셨다는 장면에 머릿속을 다시한번 스쳐지나가네요!
이영화는 잔잔한 여운이 오래 가는 듯합니다.
강한 임펙트를 원하신다면 별로 추천하고 싶지 않았지만, 꽤나 괜찮았던 영화.